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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새솔동 지명의 제정과 배경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오피니언

 

현재의 새솔동 지역은 시화방조제가 완공된 후 바다의 갯벌을 매립한 지역이다. 2017년 1월 20일에 수자원공사와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가 ‘송산 그린시티 동측지구 마을 및 시설 명칭 부여’ 학술 용역을 계약했다. 용역단 (김용덕박사. 김정수박사. 강현모박사. 정찬모 향토사학자) 보고서를 기반으로 새로운 동 명인 새솔동과 주위의 신외리, 장전동, 유포리의 땅이름의 뿌리와 구전되는 구비문학, 보존하고자 하는 민속신앙과 새솔동 주위의 민속, 문화적 배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새솔동의 지명은 필자가 제안하고 입주민들의 의견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 제정된 지명으로 순수한 우리말의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새하마노의 동쪽인 ‘새’를 사용하였는데 이‘새’는 처음이라는 의미와 ‘새로운’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고, ‘솔’은 ‘소나무’를 나타내는 우리말로서 송산의 동쪽과 새로운 송산의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정하였다.

 

새솔동의 민속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외리의 경우 예부터 포구를 이룬 마을로서 구한말에는 지형이 인천과 닮았다 하여 남양인천(南陽仁川)으로 불렸다. 그 후에 인천항이 발전함에 따라 ‘신외리’로 부르게 되었다.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으로서, 1895년(고종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남양군 화척지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잔, 화수개, 내동, 중동, 외동을 병합하여 신외리이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기존 자료에 의하면 신외리에는 곶의 지형인 ‘곶안-고잔’이 있고 안동네로 불리는 내동(內洞)과 바깥동네로 불리는 외동(外洞), 신외리의 복판에 있는 중동(中洞)과 화수개라는 마을이 있다.

 

신외리의 마을신앙은 외동과 내동 모두 터줏가리를 당으로 모시고 마을신앙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1리에서는 약 10년 전부터 도당굿의 형태로 마을 공동제의를 올리고 있다. 굿을 큰 제사라고 한다면 유교식 제의는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데 1리는 그 규모가 오히려 커진 경우에 해당한다. 본래부터 도당굿의 형태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1리에서 신목으로 모시는 느티나무는 일제강점기 때인 소화 12년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지정목으로 관리가 되었다. 당시에 사기 팻말을 해두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제의는 10월 상달에 행해지나, 최근 몇 년간은 중단되고 있다. 신외 2리에도 1리보다 그 크기가 좀 작으나 터줏가리 형태의 당이 있다. 이 마을의 신목은 소나무였으나, 본래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시지 않았을 개연성도 높다. 어른들의 기억으로는 이곳에 무당들이 들어와 당굿을 행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시화호가 막히기 전에 인천과 더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바다 일과 관련된 일들을 생업으로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규모와 형식이든 무속에 의존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2리에서는 우물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단이 된 지는 20년 정도라는데, 제수 비용은 마을 주민들이 추렴을 하여 마련하고, 돼지를 희생으로 샘물이 잘 나게 해달라고 제의를 드렸다고 한다.

 

신외리의 민간 신앙은 다음과 같다. 신외리의 어업은 인원수가 각기 다른 조별로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으로 뱃고사를 지내는 형식과 규모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보통은 서낭에 가서 떡을 해다 놓고 풍어를 기원한다. 그렇지만 멀리 배를 타고 나가거니 그 인원이 많으면 돼지를 잡고 떡을 하며 큰 규모의 뱃고사를 지냈다. 이때는 징, 꽹과리가 동원되며 두레의 기와 같은 농기(뱃기)를 앞세우고 어로에 나선다. 그리고 만선을 하면 멀리서부터 꽹과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마을에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터주를 모시고 제석, 대감, 성주 신앙이 있었으며, 목살을 풀고 뜬 거, 탓 등을 풀어냈으며 정월고사, 홍수막이, 칠석고사 등을 지냈다. 단골은 집마다 차이가 있다. 인천의 무당들이 단골로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신외리의 민간요법은 다음과 같다. 민간요법에는 삼, 하루거리, 두드러기, 홍역, 마마, 푸닥거리 등이 조사되었다. 삼을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 조사되었으나, 고잔에서 (생선)을 젓가락으로 찔러다가 청수 그릇 위에 놓고 ‘내 병 떨어졌다.’ 하고는 팥을 청수에 떨어뜨려서 잡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홍역의 경우는 바람을 쐬지 않게 하면서 보리물만 뜨겁게 하여 먹였다. 또 마마의 경우는 ‘손님 할머니, 손님 할머니’ 하면서 장독에 청수를 떠놓고 빌었다고 한다. 손님을 마마라 이르는 것은 높여 부르는 것으로, 퇴치 대상의 격을 높여줌으로써 물리치는 주술적 방법의 하나이다. 또한 푸닥거리의 경우 칼을 던져서 칼끝이 밖을 향하면 잘 풀린 것으로 믿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잔에서는 칼을 마당 끝에서 꽂았다고 한다.

 

신외리의 구비문학은 다음과 같다. 신외리에서는 마을의 신목인 서낭과 관련된 설화를 조사하였다. ‘서낭이 노해서 죽은 아이’. ‘당나무를 자르고 망한 천석부자’, ‘말굽이 붙는 서낭’ 등인데, 이들은 모두 서낭나무인 신목이 영험함을 증명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중을 넣고 쌓았다는 방죽의 이야기인 ‘중을 넣고 쌓은 방죽(승방죽)’, 그리고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고 하거나 봉선이라는 여자와 연관되어 전하는 ‘봉선대 전설’, 용이 우물 안에 들어 있어서 물이 잘 났다고 전하는 ‘용이 물을 내는 용해우물’의 이야기가 있다. 한편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광포설화도 채록이 되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비롯하여 ‘지렁이를 밴 여자’,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뱀이 용이 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 전하는 민요로는 바닷가였기에 어업 민요가 ‘뱃고사 소리’, ‘뱃소리’ 2편이 채록되어 있고, 농업노동요로 ‘밭 매는 소리’, ‘농요’, ‘논맴 소리’, ‘어허야 상사디야’ 4편이, 기타 ‘베틀 노래’, ‘학질 쫓는 고사 소리’, ‘다리세기 노래’ 등이 조사되었다.

 

지명유래에 조사는 이곳의 마을명, 도로명 및 시설명을 창안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곳의 지명에 관한 것은 설화와 관련된 ‘봉선대산(鳳仙臺山)’ 비롯하여, 신외리 서쪽의 바다 갯벌에 접했던 골짜기 마을로 등계(䳾鷄:뜸북이) 많아 붙여진 지명인 ‘둥계골’, 중동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내동(內洞). 안 동네’, 땅이 몹시 질어 붙여진 이름인 ‘구리골. 구리개’, 대개 땅 이름에서 반도형으로 생긴 갑(岬)을 이르는 말로 곶의 안쪽을 일컫는 곶안-고잔(古棧), 바닷물을 막아 농지를 만든 ‘방죽들. 방축리(防築里). 방죽머리’. 방죽들과 여우골 사이의 마을로 강의 흐름 가운데 물살이 빠르고 센 곳에 붙인 ‘강여울골’, 내동 방향의 산 아래 마을로 여우가 살았던 마을이라서 붙여진 ‘여우골’, 동이를 만들었던 곳이어서 불리어진 ‘동이터’, 위에 있는 마을이라 ‘웃말’, 봉선대 아래 마을로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곳에 붙여진 지명인 ‘화수개’, 창문초등학교 뒤에 높은 산인 ‘박산’, 당이 있는 데서 건너다보이는 높은 산인 ‘구럽산’, 가래추 큰 게 있다는 ‘가래울’, 전에 거기 술집이 있었다고 븥여진 ‘사창’, 인천으로 붙었다가 남양으로 되었다고 붙여진 ‘남양 인천’, 떠밀려 온 섬이라고 붙여진 ‘저울이섬’, 2리에 당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당너머’, 산의 형상이 모양이 범의 모양이라 붙여진 ‘범머리’, 쥐불놀이나 달맞이를 할 때 확 터졌다고 해서 ‘활딱지’ 등이 있다.

신외리의 입향조는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왔을 개연성이 높다. 왜냐하면 외동이나 내동, 고잔 등에서 오래된 성씨들이 대개 13대 이거나 14대라고 하며 각각의 성씨들이 공히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왔을 것이라 제보하고 있다. 1리인 외동은 밀양 박씨, 2리인 내동과 고잔은 평산 신씨와 경주 최씨가 각기 터전을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외리 앞바다의 매립전의 모습을 보면 뭍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크고 작은 수로들이 있었고 그곳에 조그만 포구가 있었다. 이 수로를 통해 고깃배가 드나들었는데, 수로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어서 어부들은 구분해서 불렀다. 고유어로 지어진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포구나 물길의 지형적 특징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