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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화성의 정신문화적 효용과 가치 - 원효대사의 오도처(悟道處)

정찬모 오피니언
(화성지역학연구소 소장/한국땅이름학회 이사/(사)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 화성시문화재지킴이 회장/화성시주소정보위원)

화성시의 정체성을 이야기 한다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충’과 ‘효’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가미한다면 ‘예’가 있다. 모두 근현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생된 것이다. 지역 정신으로만 머물지 않고 국가 정신의 기반을 조성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다. ‘제암리 3.1만세운동’, ‘정조와 현륭원’, ‘용주사의 부모은중경’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까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던 정신문화의 산실인 원효의 깨우침의 장소가 화성에 있었다는 사실이 4회의 학술발표를 통하여 확인되어 그동안 '오도처가 어디인가?' 에 대한 논란이 마무리 되었다.

 

오도처가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백제대형무덤이라는 사실은 우선은 지정학적으로 당성이 삼국시대 무역항으로 중국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로도 갈 수는 있으나 한강 이북은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으로 갈 수가 없고 결국 화성의 당성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당시 당성은 중국 당나라로 가는 최단거리로 당성에서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중국의 산동반도로 가는 길목이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료를 보면 원효성사와 의상대사는 650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육로를 택해 고구려 지역을 지나가다가 간첩으로 몰려 구금되어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서 해로로 가기 위해 기다렸다가 660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661년 화성의 당성으로 오게 된다. 당성에 거의 가까이 왔을 때 캄캄한 밤에 비를 만나 비를 피하기위해 동굴 비슷한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 하게 되면서 갈증이 나서 옆에 있던 바가지의 물을 맛있게 먹었으나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골에 고여 있던 물이었다. 해골물인 것을 알고 구토를 하고 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을 얻고 원효성사는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대사 혼자서 중국 당나라로 향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송나라 스님인 찬영이 988년에 쓴 송고승전 의상전에 기록이 남아 있어 확인하게 된 것으로 송고승전 의 「의상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與元曉法師同志西遊 行至本國海門唐州界 計求巨艦 將越滄波 倏於中塗遭其苦雨

(의상이)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 하여 서쪽으로 유행하였다.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너려 했다. 갑자기 도중에 심한 폭우를 만나...

곧 길 곁 토감(土龕) 사이에 의지해 은신(隱身)했다.

 

송고승전 의 저자 찬영이 어떤 자료에 의거해 기술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의상전」에 해당하는 만큼 의상의 전기 자료에 의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가 어디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었으나, 당주(唐州)가 오늘날 경기도 화성의 당성(唐城)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은 학계의 대다수 의견이고, 백곡리 백제고분 옆의 지명이 ‘해문리’로 이는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전국에 단 1곳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 기록으로는 통일신라 890년(진성여왕 4년)에 건립된 충북 제천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에 기록된 직산(樴山)이란 지명이다.

 

월랑선사( ~ 883)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한 선사(禪師)인데,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欲扣玄微爰抵樴山寓▨▨▨▨乃神僧元曉成道之所也”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樴山)에 이르러 (4자 결락)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元曉)가 도를 깨치신 곳이었다.

 

깨달음을 얻고자 직산(樴山) 어딘가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원효가 깨달은 장소였다는 것이다. 직산(樴山)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했으나 최근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입피골’이 한자음으로 풀이하면 직산(樴山)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본래의 입피골마을은 전국에 270여곳에 널려있는 피골이었으나 지정학적으로 해안가인 고모리(곶머리)에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청명산성 아래에서부터 백곡리토성, 백곡리백제대형고분군 능선 아래 골짜기인 현재의 백곡리를 그 당시에는 입피골(입+피골)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백곡리 버스정류장(마도면 백곡리 715)에 붙어있는 정류장 이름이 입피골로 표지판에 쓰여 내려오고 있다.

 

전국의 지명에 하나뿐인 화성시 마도면의 입피골(입+피골)은 전부요소인 입구라는 뜻의 입(入)을 음차로 가져와 후부요소인 피골과 합칠 때, 세운다는 뜻인 입(立)을 파생접두사로 적용하여, 피골의 본래 뜻인 기장직(稷)을 쓰고 있는 직산(稷山)이란 지명을 말뚝직(樴)으로 바꾸어 직산(樴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기장 직(稷)을 쓰는 직산(稷山)이란 지명은 전국에 70여곳에서 쓰여지고 있으나 월광사원랑선사 탑비에는 원효성사의 위상을 고려하여 입피골(입+피골)의 입+피를 말뚝 직(樴)이란 합성어로 만들어 전국에 하나뿐인 직산(樴山) 으로 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 번째로는 서산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에 원효대사 득도처에 대한 기술이다.

鄕山大寺大德和尙和尙」

見 大師鳳毛奇相螺髻殊姿因謂曰方當童稚之年旣飽老成之德如子者以吾爲師是猶守株待兎緣木求魚吾非汝師可往勝處 大師方欲僧之眞者必訪跡之古者必尋會歸覲日古老相傳鄕城山內有佛寺之墟昔元曉菩薩義想大德俱㦄居所」

憇 大師旣聞斯聖跡盍詣彼玄基以習善遂茇于其舊墟檻心猿柳意馬于以休足于以齋心經厯數年時號之聖沙彌

대덕화상(大德和尙)이 말씀하기를, “옛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향성산(鄕城山) 안에 절터가 있는데 옛날 원효보살(元曉菩薩)과 의상대덕(義想大德)이 함께 머무르며 쉬던 곳이라 한다.” 하였다. 대사(大師)가 ‘이미 성적(聖跡)에 대하여 들었으니 내 어찌 그곳 현기(玄基)에 나아가서 수도하지 않으랴.’하고, 마침내 그 구허(舊墟)에 풀집을 짓고, 원숭이 같은 마음을 우리 속에 가두어 놓고, 고삐없는 말과 다름없는 의식은 말뚝에 붙잡아 매고는 여기에 발을 멈추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수년을 지냈다. 당시 부근 사람들이 성사미(聖沙彌)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탑비에 기록된 향성산(鄕城山)은 어디인가 ! 원효대사의 오도처로 추정되는 향성산은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향기실”마을 뒷산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지명을 보면 ‘지’, ‘기’가 ‘성(城)’과 대응되고 있음을 보이므로 향기실이 향성산임은 고전사전과 학자들에 의해 증명되었고, 신라 경덕왕(757년) 당시의 지명 개칭 때 많은 지명이 바뀌었으나 “향기실”은 소지명인 관계로 남아 아직까지 그대로 “향기실”로 불리어온다고 본다.

(참조 ; 우리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2권 307p –배우리)

 

탑비에 쓰여진 원랑선사와 탄문스님이 머물렀던 향성산과 수년 동안 수행 정진한 절터는 어디인가 !

오도처로 추정되는 백곡리백제고분군 아래에는 화성백곡리사지와 백사(마도면 백곡리 산104 일원)가 있다. 백사는 백곡리 유적이 위치한 능선에 접하여 있다. 특별히 건물지의 징후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특히 명문의 존재를 통해 이곳에 ‘白寺’ 라고 하는 사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백곡리사지로 명명하였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3단 정도의 단차를 주고 장방형의 범위 안에 사역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쪽 부분에 건축부재로 보이는 돌들과 함께 다량의 기와가 쌓여 있는데, 이중에는 완형의 토수기와도 섞여 있다. 어떤 기와에는 ‘白寺’,‘白寺下家’ 라고 양각된 것도 있다. 등면의 기와문양은 주로 수지문계열이 많은데, 일부 선조문과 집사선문도 보인다. 기와 외에도 다량의 토기편이 보이는데, 연질과 경질이 섞여 있다. 연질토기는 외면에 꺾은 파상문이 시문된 직구호류의 동체편과 세격자타날문이 시문된 호의 구연부편 등 주로 통일신라기 토기들이 많다. 이외에도 다량의 백제토기편이 채집되고 있다. 채집된 유물들이 대부분 고급품들임을 감안 할 때 상당히 중요한 사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관련 문헌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경작과정에서 이미 일부가 훼손되었다.ㆍ참고문헌 : 화성시, 2006, 『文化遺蹟分布地圖』

 

이 놀라운 자산을 우리는 무관심 속에 여지껏 방치하고 냉대하여 왔다. 위대한 사상가인 원효성사가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고분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어 ‘일체유심조’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화두(話頭)는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커다란 이정표가 될만한 가르침이다.

이제까지 외부에서 화성에 대해 알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대단히 소중한 정신문화이다. 원효의 깨달음의 장소인 오도처를 제대로 알림으로써 화성시가 한국 불교 정신문화의 메카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