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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화성시 역사박물관 관장은 화성시장(?)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오피니언

 

화성시는 2011년 5월에 문을 연 화성시향토박물관이 있다. 이후 2022년 3월에 화성시역사박물관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박물관 조직을 보면 책임자는 화성시장이고, 그 밑에 문화유산과장, 역사진흥팀장 순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7명의 주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시의 역사를 보면 기원 전후에 부여-고구려계 이주민 집단으로 이루어진 온조 세력은 한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를 건국하고 마한의 북계에 위치하게 되었다. 백제의 외곽 및 주변으로는 마한의 제소국들이 작은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로 아직까지 백제의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공존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3세기 중반이 되면 고이왕(234~286)이 등장하면서 하남위례성의 백제국을 중심으로 각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간다. 이 시기의 대외활동에 대해서 중국 사서는 마한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백제는 서북쪽의 낙랑, 동북쪽의 말갈족을 방어하면서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을 거의 차지하여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확립했다.

 

백제는 고이왕 때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한 후 근초고왕(346~375년)대에 이르러 대외정복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남쪽으로 마한의 잔존세력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전라남도 남해안까지 확장하였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입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4세기 중엽 최전성기를 구가한 백제의 영토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전역과 강원도, 황해도 일부까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5세기대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통해 백제의 북경을 압박했다. 결국 475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장악함과 동시에 아산, 천안, 충주, 조령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화성 일대는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고 성왕(523~554) 때에 다시 사비성으로 천도하여 국가체제를 강화한 후 신라 진흥왕과 동맹하여 551년 한강을 되찾았으나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553년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즉 6세기 이후 고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한 신라는 대외정복사업에 나서 한강유역까지 차지하게 된 것으로 이로써 화성지역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85년에는 각 지방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한다. 현재의 화성시 지역은 한산주 46개 현 가운데 하나였으며, 한산주는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원도 일부, 충북 일부, 그리고 평안남도와 충청남도의 일부까지도 포함하는 가장 넓은 주로서 1小京(中原京)과 27개 군에 46개 현을 두었다.

 

수원은 1271년 도호부가 되고, 1308년 지방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수원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 전국의 목을 폐지하면서 다시 부로 격하되었다. 1384년에는 왜적이 수원 공이향에 침입하였으며 부사 허조가 왜적의 간첩 3명을 생포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향남지구는 수원부의 향으로 편입되어 있었으며 발안천을 따라 왜구가 침략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원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양광도에 속해 있었으며 7개 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수원은 양광도의 계수관이 되었다. 1414년 이후에는 수원은 도호가 설치되었고, 판관과 함께 중앙에서 종6품의 교수를 파견하여 종9품의 훈도와 함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향남은 조선 초기에 면으로 직촌화하였다. 세조 때는 수원부에 진을 설치하고 판관을 두었다가 1526년 군으로 강등되었다. 1535년에 다시 도호부로 복귀되었고, 1602년에는 방어사를 겸하였고, 1668년에는 토포사를 겸하였다.

 

1789년에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 주산인 화산으로 옮겨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1793년 수원을 화성이라고 명명함과 동시에 유수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부터 ‘화성성건’을 시작하였다. 이 때 수원부는 부내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공이향면과 서북면을 합하여 공향면으로 편제하는 등 50면을 40면으로 광역화했다. 1895년 5월 26일 을미개혁 이후 화성유수부가 폐지되어 수원군으로 강등되었으며, 이후 관할 구역도 크게 줄어든다.

 

현재의 수원시는 1789년에 화성시 융건릉 자리에 있던 수원부에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함으로서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긴 신도시인 것이다. 화성행궁과 화성 성곽이 조성된 역사부터 시작하여 200년의 짧은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원시에는 수원시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구 인원이 수원시박물관 관장 외 31명의 주무관, 수원화성박물관은 관장 외 22명, 수원광교박물관은 관장 외 22명이 역사문화 발굴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면에 100만 도시가 된 화성시에는 2006년 문화유적분포조사에 의하면 517군데의 유적이 존재한다고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유산으로 삼국시대 당나라로 가는 무역항인 당성을 비롯한 성곽이 22군데이고, 원효성사오도처로 알려진 백곡리고분등 다수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등록문화재가 수원시 40곳, 화성시가 50곳으로, 수원시가 보유한 비지정 문화재는 거의 없는 상황이나, 화성시는 많은 비지정 문화재가 아직 등록되지 않고 산재해 있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지켜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 많은 비지정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화성시가 역사문화도시로 언제쯤 자리매김이 될까? 화성 탐방이 수도권에 널리 알려질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