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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이든의 지혜

윤왕로의 음악이야기 7
백석대, 협성대 교수 역임. 화성심포니 지휘자
상명대, 가톨릭대, 국제대 강사역임.
독일 쾰른, 프랑스 디종 국립 음악원 졸업.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프란츠 요셉 하이든 (독일어: Franz Joseph Haydn) 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732 ~ 1809) 기숙 성가대에 입단한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요셉의 동생도 입단했고, 그때 쯤 요셉에게 변성기가 온다. 성가대는 요셉이 거세하여 카운트 테너 카스트라토를 제안한다. 즉 보이 소프라노이다. 당시는 거세해야 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발성 연습 만으로 가능하다. 요셉은 성가대를 나오게 되어 거세를 모면하고 나중엔 결혼한다. 

 

아내와 금슬이 안 좋았고 악처로 알려져 있다. 애써 작곡한 곡은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파이 포장지로 전락했다고 한다. 요셉이 에스텔하지 공작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운영 할 때 새로 첼리스트가 입단한다. 기존에 있던 사람보다 젊고 잘해서, 인사권 있는 요셉이지만 지혜로운 그는 첼로 협주곡 1번을 작곡하여 신입 첼리스트를 협연시키고 기존 단원 뒤에 자리하게 한다. 그가 아들을 낳자 대부가 된다. 그 후 궁정악단 지휘자로 성장하여 19세기 음악계의 중요한 요셉 바이든이 된다. 요셉 바이든은 현재 미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음악가다. 하이든은 에스텔하지 공작의 오케스트라의 화합과 바이든에게 영감을 주었다.

 

말년 하이든은 에스텔하지 공작이 돌아가시고, 음악에 큰 관심 없는 공작의 장남이 물려받았다. 

투자없이 무급 휴가를 받게 된 하이든은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한다. 아들 에스텔하지 공작과 좋은 관계였던 하이든은 당시 가격으로 약 11억을 벌어서 귀국한다. 음악가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액수이고 뉴우턴이 주식투자로 큰 손해를 본 것과 대조된다. 큰 수입으로 말년을 편히 보내고 여생을 마친 하이든은 나폴레옹의 침공 때 돌아가셔 조촐하게 장례를 치루지만 몇 년 후 세상이 안정되자 아들 에스텔하지 공작은 하이든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루려고 무덤을 팠는데 그의 머리가 없었다. 

 

무려 145년 후 1954년, 유해반환소송을 통해 찾은 머리는 당시 누가 천재 음악가의 머리를 연구한다고 훔쳐 간 것이었다.

 

고전주의 음악의 중심이 되는 하이든 음악가는 베토벤에게 영향을 주어 낭만주의 음악을 열게 된다. 

 

우리 화성시에도 그런 큰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