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인 ‘필립스엑시터 아카데미’에는 소크라테스 교육방식에서 유래한 ‘하크니스테이블’이 있다. 교사와 학생이 ‘하크니스’라고 불리는 원형테이블에 앉아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교육방식으로 여타 토론 수업과 다른 점이라면 선생님도 토론자 중의 한 명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발언자의 의견 개진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발언내용을 경청해야 한다는 점이 되겠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하크니스테이블’의 교육목적이 ‘발언’에 있지 않고 ‘경청’에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모든이의 의견을 동등하게 듣는다’라는 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북미의 인디언들은 집회 시 ‘토킹스틱(talking stick)’을 사용했다. 토킹스틱은 긴 지팡이 형태로 발언권은 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며,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킬 때까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발언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반면 발언을 듣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경청’의 시간이 주어진다.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 ‘말하기’에 주안점을 둔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소통은 내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경청’은 온데간데없다.
단순한 듣기(청취)와 귀 기울여 듣기(경청)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경청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동기(動機)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서 이해도를 높이는 행위’로 정의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말하기’는 ‘경청’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경청하지 않고 말한다면 올바른 대화로 이어질 수 없다.
토론은 더욱 그러하다. 발언자의 의견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나의 의견을 개진해 나갈 수 있다. 경청하지 않고 토론자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여서는 안된다.
‘필립스엑시터 아카데미’의 하크니스테이블, 그리고 과거 북미 인디언들의 토킹스틱에서 우리는 경청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배워야 한다. 경청을 통해 소모적 감정과 다툼은 사라지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대안 또한 경청을 통해 도출된다. 경청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효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