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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박용옥 회장 (화성시 장애인 대모)

(사) 화성장애인연맹 화성 DPI 회장 박용옥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법이 장애인복지법”
"장애인 치료 프로그램도 장애인의 자존심을 지켜줘야"
"정부에서 장애인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줘야 한다"
"장애인도 스스로 삶의 주인공"

 

/마음의 소리를 따라 꼭 만나 뵙고 싶었던 화성시 장애인 대모 박용옥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질문도 생각 하지 않은 채로 ‘선생님 삶의 얘기를 듣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했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희미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어요. 독자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편집자주

 

먼저 장애인이 쓴 문학집 희나리 3집 발간사를 소개합니다.

 

<희나리 3집을 펴내며>

 우리 장애인들이 쓴 문학집 3집 출판을 하게 되어 무한 기쁜 마음입니다. '희나리' 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덜 마른 장작을 일컫습니다. 제가 장애인들과 함께한 세월이 20년을 넘었습니다. 제가 20여 년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온 줄 알았으나 실상은 장애인들이 나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업도 돈도 자식들의 행복도 모두 잃었을 때 곡기 끊고 7일째, 죽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잠겨있는 문을 10분 동안 두드리고 내 손을 잡더니 수원종합운동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눈앞에 시각장애인들이 점심밥을 먹고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음식도 더듬으며 찾아 먹지 못했습니다. 난 그들을 보면서 돈 잃고 재산 잃었다고 죽으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장애인을 만나 장애인복지에 미쳐 20년 넘게 살았습니다. 장애인 부모의 눈물이 있었기에 화성시 장애인 부모회를 창설했습니다. 장애인 이동센터가 장애인들을 어디든 데려다주는 세상이 열렸습니다. (중략)

 

Q> ‘희나리’ 3집 발간사를 읽고 회장님 꼭 뵙고 싶었습니다. 화성시 장애인복지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발간사에도 썼던 것처럼 실상 저의 힘든 시간을 제 자식들도 잘 몰라요. 엄마로 사랑 표현을 잘 못해 아쉬운 점이 있으나, 그래도 제 자식들이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이 글을 읽고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에게 문학을 지도해 주신 교수님도 돌아가시고,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안 되겠다. 꼭 3집을 발간해야겠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글을 솔직하게 썼어요.

 

장애인복지라 하면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비장애인이 더욱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해요. DPI이라는 단체는 대한민국 장애인에 관한 법을 만드는 단체입니다. 신들린 것처럼 일했어요. 화성시에 유니버설 디자인이 도입되어 버스 정류장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안내가 되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생기고, 인도에 턱이 없어진 것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육교에 엘리베이터가 생기면 장애인 보다는 노약자나 임산부, 어린이들이 더 많이 이용합니다. 실상 몸은 불편하나 장애인 복지 카드가 없는 분들이 훨씬 많아요. 장애인 복지 사업은 미래를 보는 사업입니다.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법이 ‘장애인복지법’입니다.

 

90년대 말에는 치열하게 싸웠어요. 비가 오는데도 남양 시내를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인도 턱을 오르내리며 몇 시간이나 왔다 갔다 해요. 그럼 시청 복지과에서 사진 찍어가고 몇 달 뒤에 공사를 해요. 그랬어요. 시청 직원들은 왕막 (왕마귀) 라고 불렀고, 장애 어린이 부모는 ‘천사 할머니’라고 불렀죠.

 

장애인들이 이동할 수 있는 차량이 지원될 수 있도록 시장을 설득해 지원받도록 애를 썼고, 뇌병변 장애가 있는 아이들 치료 과정을 찍어 알렸어요. “대한민국 국민이자 화성시민으로 보호해 달라”라고 외쳤습니다. 장애인 이동 차량 기사들을 통해 회원 가입서 138명을 받아 장애인 부모회를 창설하게 됐습니다. 장애아를 키우는 아버지께서 회장을 맡아 그분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 마음을 치유하고자 상담 프로그램도 시작됐어요. 시간이 지나 부모들끼리 상담을 해주는 “동료 상담치유 프로그램”도 생겼습니다. 보건소에서 하는“희망 상담”도 생겼고요. 그 후에 안녕동에 어른들을 위한 “장애인 자립센터”일도 했습니다. 지금은 전국 사업이지만 ‘장애인 헬퍼 사업’을 화성시가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또한 재활 치료를 보건소에서 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런데 장애인 재활 교육을 보건소에서 하는 것을 지켜보니 콩을 젓가락으로 옮기고, 주판을 올리고 내리는 등 정도 교육만 하고, 계단도 겨우 붙들고 다니는 방식으로 하고 있었어요. 사회에서 펄펄 날던 사람들이 어쩌다 풍 맞아서 재활하는데, ‘자존심은 지켜줘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난타를 시작했어요. 화장실도 못 가던 사람을 끌어다 의자에 앉혀서, 채를 손목에 둘둘 감아 주고, 한쪽은 쓰니까 그냥 주고 난타를 했어요. 이렇게 신나서 막 치다가 장단에 맞춰서 “뚱” 치는 거야. 이게 한번 가서 소리가 나든 말든 어쨌든 움직이게 되는 거, 그러면 그 희열은 말도 못 해요. 그 사람은 ‘까르륵’ 넘어가는 거야. 너무 신나서. 저는 보였어요. ‘어느 정도 지나면 치겠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에요. 재활 치료를 난타로 했어요. 배우는 사람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그런 세월이 온 거예요. 지금은 시에서 강사비 정도는 지원해 주시만, 난타 도구들은 사업 계획을 써서 공동모금회나 사회복지협의회나 이런데다 기획서를 써서 받아왔어요. 참 우리 식구들이 너무 힘들게 일하고 있어요.

 

이제는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요. 병점2동 동사무소에 있던 복지사가 저한테 와서 “여사님이 제 롤 모델이에요.” “여사님만 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이 곧 국장이 되던가 그럴 거에요. 지금은 화성시 공무원들이 나를 만나면 뭐든 도와주려고 해요. 이제는 사람들이 내 이름은 알아요. 얼굴은 잘 모르지만.

 

Q> 제부도에 사시네요? 명함에 있는 집 사진이 예뻐요. 

 

A> 아침에 제부도 집에서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 커피 한잔하는 게 너무 좋아서 아직 제부도에 살아요.

 

Q>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전국이 장애인복지 불모지이고 화성시도 사정은 같았지요. 제가 장애인 복지법을 만드는 곳 회장이 된 것도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화성시장애인복지가 변해온 세상을 오롯이 보아온 증인인 셈입니다. 아르딤복지관이 생겼고. 장애인체육관이 곧 개장 될 겁니다. 화성시 장애인이 3만 2천명이고, 그 가족들까지 합하면 십만명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가정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이들이 떳떳하게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잘 살수 있게 하려면, 정부에서 장애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분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가는 세상을 만든다고 해도 그들은 뒤처지게 마련이고, 스스로 좌절해서 자꾸 숨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세상이 오겠지요.

 

Q> 이제 6개월된 미담플러스에도 좋은 말씀 해주세요

 

A> ‘미담플러스’ 이름 잘 지은 거 같아요. 좋은 미담 많이 발굴해서 좋은 얘기 많이 쓰고, 나쁜 건 한방씩만 세게 때려요.

 

/회장님과 인터뷰 하며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의 충만한 지혜를 들려주신 박용옥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귀한 인연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편집자주

 

박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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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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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플러스 대표, 편집장 박상희 기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