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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누구든 소중한 생명(生命)이기에

수필가 김종걸 열 한번째 이야기

 

 

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소리조차 내게는 마치 살려달라는 신음처럼 애절하게 들려왔다. 새순을 싹틔우는 생명력이기에 얼어붙었던 동토를 녹이고, 대지의 따스한 숨결로 생명을 잉태시킨 봄바람이 아닐까.

 

제아무리 세찬 봄바람도 해가 지면서 차츰 가라앉더니, 밤의 적막과 함께 조용히 다가온 안개가 온 천지를 덮었다. 안개가 자욱한 그날 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처럼 삶의 저편에 서 있던 한 청년이 내게 잊힐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 될 줄이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도 없겠지만, 아프지 않고 성숙하는 청춘 또한 드물 것이다. 이제는 나도 쉰 세대라고 놀림을 받는 중년이지만, 젊음의 뒤안길을 뒤척이며 돌아왔다. 내게도 한때 청춘의 절규를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어 본 적이 있었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수액으로 자라고, 사람은 관심을 받으면서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모든 생명체(生命體)는 시간을 머금고 그 속에서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유난히 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어느 날 밤이었다. 어둠의 정적을 깨뜨리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자살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아니 이 밤중에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다고 자살이란 말인가? 자욱한 안개 탓이었을까. 이런 일로 처음 가는 것도 아니건만 그날은 유독 더 긴장되었다. 목적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공적인 업무규정은 자살을 결심한 자를 찾아내어 보호자에게 인계하고, 자녀가 자살을 결심하였으니 철저히 관리하라는 당부와 요청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렇게만 하지 못하고 수신을 안 하는 당사자에게 계속 전화했다. 포기할지 말지를 생각하다가 또 전화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보고 규정대로 실행하리라 다짐하면서도 또다시 전화를 걸곤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끈질긴 신호음에 “여보세요.” 문제의 주인공이 전화를 받았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토록 애타며 가슴 졸이던 순간에 반가운 메아리처럼 응답한 그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분을 밝히고 말았다. 그가 한 마디로 “누구라도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절체절명의 그를 꼭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5분만 시간을 달라”면서 애걸하다시피 매달렸다. 그는 “나는 누구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으며, 빨리 죽고 싶다, 돌아가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 마음속에서는 ‘앗,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잠시 후, 내 관심의 끈이 닿았는지. 요지부동의 그가 얼굴만 보여 주겠다며 나가겠다고 한다. 신기하고도 반가웠다. 감성에 호소하는 시인이 아니면 어쩌랴. 딱딱한 이미지의 얼굴이지만, 생명(生命)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랴. 그랬다. 나를 만나겠다고 하는 그의 응답이 가상하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한 줄기 희망의 줄을 잡은 것 같았다.

 

드디어 동반자살을 결심한 그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쌀쌀한 표정으로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을 잡자 “손 놓으세요” 하며 완강하게 뿌리쳤다. 그래도 “학생 같은데, 그냥 내 손잡고 가요.”라면서 다시 한번 빼려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열아홉 살인 그에게 나는 그 또래문화를 다정하게 얘기해 주며 공허한 그의 마음속을 함께 유영하면서 그의 고민과 속사정을 경청했다. 그는 매우 어두웠으며 외로움에 굶주리다 못해 혈색도 없어 보였고 마치 여린 나뭇가지 같았다. 웬만큼 흔들려서는 나무에 수액이 전달되지 못하는 연약한 나뭇가지. 그 아이의 가엾은 처지에 연민이 몰려왔다. 그가 품고 있는 절박한 생각들이 내게 전달되었다. 이미 우린 눈빛만으로 소통되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여태까지 살면서 한 번도 누구와 따뜻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는 그가 계속 싸늘한 반응을 보였지만, 측은한 마음이 더해서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부모님 이혼 후 공부 못하는 그를 가족 모두가 미워했다고 한다. 칭찬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늘 핀잔뿐이어서 가족이 싫었고, 성악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항상 반대했단다. 그래서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서로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여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자초지종을 말했다.

 

어차피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바보처럼 살 바에는 죽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아 결심했다면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자살준비물을 갖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그는 그 약속 장소로 꼭 나가야 한다고 서두르면서 내게 다그치듯 말했다.

 

한 시간째,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공감해 주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응수하며, 오히려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가 처한 현실에 말문이 막혀 어떤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지, 생명의 소중함과 자살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유에 관하여 어떻게 설득할지 막막했다.

 

생명(生命)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명령(命令)이니 사람의 생각보다 더 엄숙하다고 할까. 아니면, 정말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할까. 머뭇거렸다. 혹시 흐르던 시간도 우리 편이 되어 귀한 생명을 위해 머뭇거려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일단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3인과의 카톡을 차단하자고 제의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잽싸게 핸드폰을 가로채어 동반자살 팀과 대화하던 흔적을 모두 삭제한 후 차단했다. 돌발적인 나의 행동을 거부하지 않고 그가 그런 나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점점 그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지금 심정이 어떠냐는 나의 질문에 생각보다 시원해졌다고 대답했다. 집으로 향해 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네 개로부터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떤 영웅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면, 나의 지나친 생각일까.

 

다음날, TV 뉴스에 S의 시 해수욕장에서 그와 함께 자살 모의를 했던 세 명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떴다. 아찔했다. 하필 그날 그가 전화했다.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내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쑥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새롭게 결심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주변인들에게 더 진심으로 가깝게 다가가서 정성껏 식물에 물을 주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맘껏 쏟아 보리라.

 

새순을 틔우던 나뭇가지에서 이제 막 꽃봉오리가 솟았다. 안개가 자욱했던 그 밤을 생각하면 아직도 내 가슴은 싸늘한 전율이 돋는다. 인정받고 싶은 그의 절규가 봄바람 속으로 메아리쳐 들려온다. 누구나 소중한 생명(生命)이기에.

 

오늘도 봄바람은 또 다른 아픔으로 꽃을 피워내며, 지친 내 영혼에 수액을 전달하는 나무처럼 생명(生命)의 고귀함을 온몸으로 깨닫게 한다. 삶의 새로운 의미를 내게 가르쳐 주면서.

 

프로필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 (2016,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2019)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하면서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