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假面)은 본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는 물건이다. 연극이나 축제에서는 가면을 쓴 사람이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한다. 하지만 일상에서의 가면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허상이다.
타인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 혹은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이미지가 얇은 막처럼 얼굴을 덮을 때 우리는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은 때로는 우리를 보호하고, 때로는 우리를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문득 이런 물음을 스스로 던져본다.
“나는 지금 어떤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가?”
어린 시절, 사실상 가면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았다.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에서, 부모님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나를 발견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의기양양하게 군다 해도, 부모님 앞에서는 얌전한 아들로 행동해야 했고, 선생님 앞에서는 성실한 학생처럼 보이려 애썼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은 관계마다 다른 얼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고, 동시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착한 아이’라는 가면을 쓰게 되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또래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가면이 나를 보호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했다.
오늘날 청소년들 역시 SNS라는 무대 위에서 ‘좋아요’를 얻기 위한 가면을 쓴다. 웃는 얼굴, 멋진 모습, 행복해 보이는 장면들만 올리며, 실제의 고단함은 철저히 감춘다. 어쩌면 ‘착한 아이’ 가면이 오늘의 ‘좋아요 가면’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장하면서 사회는 새로운 가면을 요구했다. ‘착한 아이’의 가면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발을 들이면서 ‘유능한 사람’의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능력이 있어 보이기 위해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았고, 동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몸이 지쳐도 일을 놓지 않았다. 내 마음은 때때로 불안했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삶을 지배했다. 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꽤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가면의 역할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가 없었다. 만약 벗는다면 초라한 민낯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불안이 가면을 단단하게 붙들어 매고 있었다.
지금 청년 세대 또한 비슷하다. 이들은 ‘자유로운 개성’을 강조하지만, 사실상 취업난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는 가면을 쓴다. 자기소개서 속 화려한 스펙, 꾸며진 이력, 면접장에서 내뱉는 정답 같은 말들. 그것은 모두 사회가 요구한 가면이 아닐까. 청년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며 가면을 덧씌웠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 또 다른 가면을 쓰게 되었다. 바로 ‘가장(家長)’이라는 가면이었다. 가장의 가면은 책임과 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족에게 안정된 삶을 주기 위해, 욕망을 뒤로 미루고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보다 돈이 되는 일을 택했고, 때로는 가정 안에서조차 솔직한 감정을 숨겨야 했다. 불안하거나 힘들어도 “괜찮다”는 말을 내뱉으며, 든든한 버팀목인 척했다. 그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면은 무거웠다. 책임의 무게는 점점 내 어깨를 짓눌렀고,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잊어버렸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두려운지조차 모른 채 단지 버텨내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 되어갔다.
이 무거운 가장(家長)의 가면은 우리 사회가 지닌 그림자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탈진할 만큼 일하다가도 아버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무뚝뚝하게 굴고, 힘들어도 가족 앞에서는 의연한 척했다. 그러다 보니 탈진에 시달리면서도 울지 못했다. 사회에서 가장에게 언제나 강해야 한다는 큰 가면을 씌워놓았기 때문이다.
삶을 이어가는 동안 사회가 쓰고 있는 거대한 가면들도 보았다. 특히 정치와 권력의 세계는 가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겉으로는 봉사를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권력을 탐하는 얼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변명에 급급한 얼굴. 이런 얼굴들은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며 환경 보호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이윤 극대화에 몰두한다. 친환경을 내세운 광고가 넘쳐나지만, 그 뒤에서는 여전히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폐기물이 쌓이고 있다. 그것은 기업이 쓰는 ‘착한 얼굴의 가면’이다.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그들의 가면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언제쯤 자기 민낯을 마주할 용기를 낼까.” 그렇지만 곧 깨달았다. 그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언제쯤 진짜 얼굴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은퇴라는 인생의 전환점에 서자, 처음으로 내 가면을 찬찬히 바라볼 여유를 얻었다. 생업의 무게가 덜어지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망과 감정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면 속에 갇혀 살아온 탓에,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 법조차 잊었다. 그러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진짜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 그것은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단지 소박하고 조용한 나다운 모습이었다.
이와 동시에 사회는 은퇴자들에게도 새로운 가면을 씌운다. ‘여가를 즐기는 노년,’‘행복한 시니어’라는 이미지를 강요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노후 빈곤, 고독사, 돌봄 문제 같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개인의 은퇴가 새로운 자유이듯 동시에 또 다른 사회적 가면을 마주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가면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는 나를 보호하는 얼굴이다. 세상의 거친 바람 속에서 내 약한 마음을 지켜주고, 때로는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속이는 얼굴이다. 진짜를 보지 못하게 가리고, 결국에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잊게 만든다. 오늘날 사회 역시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도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하고, 평등을 외치면서도 계급적 벽은 두껍다. 자유를 말하지만, 사실은 소비와 경쟁의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제한된 자유일 때가 많다. 사회 역시 개인처럼 두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곧 상처를 드러낸다는 의미다. 허영과 위선, 두려움과 불안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를 드러낼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벗지 못한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부족하고 초라한 나, 그러나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진짜를 인정하는 일 말이다.
사회 역시 가면을 벗어야 한다. 권력의 가면, 이익의 가면, 위선의 가면을 벗고 진짜 문제를 마주할 때, 비로소 치유와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이제 다시 처음의 물음을 떠올린다.
“나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가?”
아마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안다. 그것이 가면임을. 언젠가는 벗어야 할 순간이 온다는 것을.
가면을 벗고 나면 상처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처는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나에게도, 사회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늘도 다짐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언젠가 진짜와 마주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가면을 벗은 얼굴로 설 수 있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내 가면을 벗어 내리라고.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