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이면 찬 서리가 온 대지 위를 덮고 얼어붙은 잔디가 화살촉 같이 날을 세운다. 앞산의 숲은 고적하게 야위었다. 가난한 숲의 모든 나무가 야위어 있다. 야윈 숲속의 나무는 한오라기 거짓도 없이 자기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추함이나 부끄러움도 없다. 늘 조용하고 침착하게 그 자리에 서서 추운 겨울의 아픔을 견딘다. 그 작은 풍경 사이로 밤이면 별들이 들꽃처럼 피어난다. 그지없이 평화롭다.
새 달력을 벽에다 걸었다. 읍내에 사는 내가 새 달력을 걸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몸 아픈 날만 빼면 그날이 그날일 뿐인 일상이다. 그래도 원죄를 탕감받을 요량으로 지하철 입구의 노숙자가 손을 벌리면 몰래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놓아주었고, 연말엔 구세군 냄비에 지갑의 돈을 넣기도 했다. 이토록 소박하게 살아가는 촌부(村夫)의 눈앞에 자꾸만 놀라움과 허탈감으로 어깻죽지에 힘이 빠진다.
어느 권세에도 빌붙어 본 적 없이 나름의 역사를 몸으로 때우면서 살아왔건만, 늘 실패만 하는 정책결정자들에게 분노하게 되고, 앓는 소리만 하는 경제에도 노여워한다. 이런 사정을 나 몰라라 제 잇속만 챙기는 정치권에는 더 분개한다. 서로 남 얘기엔 귀 막고 자기 목소리만 높이며 분격(憤激)한다. 12.3 계엄 사태로 인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 탄핵을 외치는 사람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폭발 일보 직전의 얼굴로 배회하고 있다. 서로의 관계가 병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어낸들 곧 따라 함께 힘들 뿐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강물은 흐르기 때문에 썩지 않는다. 흘러간다는 것은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다는 것이다. 서로가 분열되어 한쪽에선 남의 잘못을 외치고, 또 한쪽에서는 그 반대를 외치는 소리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그 파장은 벌집 건드려 놓은 것처럼 난리를 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점차 시간 저편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렇게 어렵고 쓸쓸한 난세의 길목에서 새로운 삶을 희망한다. 이제 묵은 잎은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잎은 피어날 것이며, 새잎으로 피어날 사람이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세상의 그 모든 것이 부담되지 않는 함박눈이라도 퍼부었으면 정말 좋겠다. 모든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2025년 1월 5일
김종걸
프로필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 (2016,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2019)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하면서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