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강풍이 분다는 예보도 없었는데 바람이 몹시 세차다. 창문이 환하여 머리맡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다섯 시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을 시간인데도 사물의 윤곽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창문 앞에 하현달이 보인다.
젊은 시절, 꿈을 포기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방황을 거듭하는 날이 많았다. 지금 하던 일을 그만두고 놀아볼까. 라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주름 팬 얼굴을 떠올리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섣부르게 현실과 타협해 버렸다는 후회가 내내 가슴을 쓰리게 했다. 그때마다 하현달은 내 친구처럼 함께 했다.
이 시기는 내 청춘에서 가장 패기만만하고 자유스러워야 할 때였다.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시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것을 향해 온몸을 던져 도전해 보아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당시 현실은 너무나 일찍 내 삶의 테두리를 그어 놓았다. 거기서 자족하고 안주하는 것은 더 싫었다. 내가 생각한 미래는 고작 이런 일을 위하여 목말라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망망대해로 떠밀려 나가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앞섰고, 그 원인을 찾아가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내면의 심경이 복잡하여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어떤 경지에 다다를 수 없었다. 다만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한 삶의 몸부림으로 늘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그 사연이 밑거름되어 생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갔다. 늘 정해진 테두리에 갇혀 있는 생각뿐이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 현실은 내 타는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있었더라면 삶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내가 삶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데에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어지러운 사회현실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반감 역시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신부의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가톨릭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부가 될까?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어느 날, 성당에서 새벽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성모상 앞에서 홀연히 기도하고 계신 어르신을 보니, 늘 새벽이면 장독대에 냉수 한 사발 떠 놓고 기도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 앞을 가려 울컥한 후, 고향 집으로 향했다.
내가 올 줄 알았는지 어머니께서는 문을 열어놓고 계셨다. 도착하자마자 잘 왔다면서 나를 껴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셨다. 그러고는 편안하게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겨 함께 생활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전날 본당 신부님의 부름을 받고 신축 중인 성당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는 침묵으로 응답하셨다.
새벽이면 하현달을 보면서 새벽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을 돕는 일부터 저녁 미사 후, 성당 신축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신부님과 한 몸이 되어 성당 신축에 정성을 다했다. 낮이면 벽돌을 쌓고, 밤이면 플래시를 비추며 쌓은 벽돌의 틈새를 점검했으며, 사제관 앞에 온실을 만들었고, 성당으로 향하는 길가에 나무를 심어 주변을 푸르게 가꿨다. 성당 내부에 제대 및 모든 장식물 설치는 물론 고해소까지 완벽하게 내부공사를 끝냈다. 교회의 상징인 종탑을 세우면서 최종적으로 성당 신축을 마무리했다. 그날 신부님께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고해소(告解所)에 들어가 한참 동안 울고 난 후, 성당을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당에서의 생활은 지금도 나에게 큰 의미로 남아있다. 훗날 아내와 그 신축 성당에서 최초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아내는 현장 경찰로 근무하는 남편의 격일제 근무로 인하여 한 달 중에 15일은 혼자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나는 야간 근무 중에 새벽이면 하현달을 마주 할 때마다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늘 다짐했다. 그 시절 매사에 성심을 다 바쳤지만, 삶은 여전히 어렵고 두려웠다.
젊은 날, 하현달을 보면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운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시절은 진정 아름다웠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은 세월 속에서 하현달을 보며 그동안의 잘못을 모두 털어놓고 숙연해진 마음으로 용서를 빌어본다.
창문을 활짝 열자 고요히 머물러 있던 달빛과 찬바람이 일시에 밀려왔다. 바람이 그치자 사위는 다시 고요하다. 저만치 하현달이 보인다. 여명의 직전, 정갈한 구도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하현달을 은연중에 마주하면서 가만히 입속으로 간절하게 뇌어본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매사에 어떤 일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아가자고.
수필가 김종걸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현) 한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후, 경정(警正)으로 퇴직
<수상>
2014년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행정안전부 장관상 수상.
2016년 제17회, 2018년 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경찰청장상 수상.
2021년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2019년 대통령 녹조근정 훈장 수상 및 국무총리 표창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