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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외로워도 괜찮아

수필가 김종걸 열 네 번째 이야기

 

봄은 외로움과 고단함을 동반한다.

나도 이때쯤이면 겨울 동안 가슴에 묵직하게 넣어 두었던 삶의 고단함을 하나둘 꺼내어 훌훌 털어버린다. 내가 사는 이곳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고 외롭다. 봄바람에 외롭고 애가 끓으며 속이 탄다. 이 외로움은 대화의 궁핍에서 오는지도 잘 모른다. 어느 땐 실낱같은 봄바람 속에 묻어오는 꽃향기에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흙내와 노을, 바람, 새와 나무, 꽃향기가 좋다 해도 그것에는 지능과 영혼이 없다. 생명의 경이와 자연의 찬연함은 있어도, 언어를 통한 감정의 교류가 없으니 헛헛하다. 숲에 들면 영혼은 맑아져도, 마음은 도리어 외롭다. 사유(思惟)는 깊어지지만 아픔과 기쁨을 공유할 수 없음에 외로움은 짙은 향기로 남아 있다. 외로움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그리움은 정(情)의 울림이고 온기다. 정의 울림과 온기가 생각날 때면 북적이면서 살았던 서울 삶을 그리워한다. 서울의 문화가 그립고, 밤이면 불의 강을 이루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그립다. 그래서 한 달에 서너 번 서울 나들이를 한다.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풍성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러고 나면 정체된 일상성에서 오는 지리멸렬함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지난겨울 모임 참석차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지인도 만나고, 저녁 모임에도 참석했다. 모임에 참석하면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다. 이런 날의 식사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소곤거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왁자하게 떠들면서 음식은 맛도 모르고 입에 퍼 넣는 자리다. 게다가 어느 모임이든 진행자가 있지만, 약방에 감초처럼 익살스럽게 말 잘하는 사람이 끼게 마련이어서 그의 입담에 홀려 연신 웃음꽃을 터트리게 된다.

그날 모임에는 외국인 아내와 둘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김포의 전원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육십 중반에 넘어선 우리는 가끔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했다. 친구는 나와 함께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했고 은퇴했다. 그렇기에 늘 지나온 세월 보따리를 풀어놓고 이야기하다가 웃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한다. 그날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친구의 얘기를 듣고 몹시 마음이 아팠다.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친구의 아내가 외로움이 심하다는 이야기였다. 아내가 낳은 자식마저도 아내의 공허함을 달래주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났고 아내의 손으로 키워낸 온전히 한국인인 아이들까지도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단다. 친구 아내의 외로움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친구는 그것이 순전히 자신이 잘 돌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며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인 부부도 속 깊은 대화가 어려운 건 서로 마찬가지다. 자식들이야 성장하면 저 혼자 큰 것처럼 우리 품에서 떠나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서 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친구는 아내의 외로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황하지만 사례를 들어 친구에게 설명했다.

 

언어는 그 나라의 정서와 감성을 담고 있다. 언젠가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서 상대방의 깊은 태클에 대해 심판에 항의하는 우리 선수들을 보았다. 당시 축구 해설자는 말도 통하지 않는 심판에 항의하는 선수의 태도를 지적하는 말을 했지만, 요즘 축구 경기를 보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유럽 심판에게는 유럽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선수가 심판에게 항의했고, 동남아 심판에게는 동남아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뛰어와서 항의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번 해설자는 요즘 축구는 항의하는 모습도 훨씬 매너 있게 잘하는 것 같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폭에는 정서적 표현 부분이 많다. 외국어로는 감정이 풍부한 우리말을 다 담지 못하고, 우리말로도 외국어의 정서를 다 표현하기 어렵다. 말이 곧 문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말에는 축약도 많아 그것에 포함된 많은 느낌을 다른 언어로 담기 어렵다.

 

지금은 친구 아내의 외로움이 어느 정도 채워졌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허함 인지도 모른다. 그게 어디 친구 아내만의 일일까. 우리는 모두 한곳이 텅 비어 있는 근원적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가 서로 고향이 달라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 시대에 살지 않았나.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 다만 그 상처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성장의 동력으로 쓸 것인지는 온전히 친구와 그 아내의 몫이 아닐까.

도낏자루 썩는 분위기에 휩싸여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오늘만은 아무리 흥겨워도 일찍 돌아오라는 아내의 말을 까맣게 잊고 신선놀음을 끝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고, 차에 시동을 걸면서부터 불안은 시작됐다. 더군다나 밖에는 나붓나붓 눈발이 흩날리고 퇴근길 인파로 거리가 넘실거렸다. 화려한 밤거리에 내리는 눈송이가 마치 낙화하는 꽃잎 같았다.

겨우겨우 외곽도로 초입에 들어섰다. 쌓이는 눈으로 이미 차선은 보이지 않았고, 중앙선은 진작부터 없어진 듯싶었다. 낭패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혹 운행 중에 졸릴까 봐 가끔 창문을 열고 음악도 틀면서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서울은 눈이 오지 않냐, 지금 어디쯤 오고 있냐?”고. 지금 출발해서 가는 중이라고 말하자 아내는 차량 안전 운행을 한 번 더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밤길 운전이 미덥지 않았는지 아내는 이십여 분 간격으로 계속 전화했다. 혹 졸음운전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다며. 평소 1시간이면 집에 도착하는데 오늘은 30분이나 더 걸려서 돌아왔다.

눈발은 여전히 흩날리는데 하얀 눈으로 쌓인 동네가 멋진 수묵화를 그려놓고 있었다. 내가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기까지 아내는 이제나저제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단다. 이처럼 나의 안전을 염려하여 애를 태우는 아내가 있음에 행복하다.

 

봄날의 밤은 더 적요(寂寥)하다. 차갑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이 꼭 얼음 조각을 흩어 놓은 것 같다. 어느 땐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온갖 새소리, 별과 달이 보내주는 추억의 소리는 봄날의 삶을 견디게 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곤 한다. 하지만 자연의 소리에 취할수록 외로움과 고독감은 한없이 더 깊어진다.

 

2025년 4월

수필가 김종걸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2019)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