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가에 빛의 산란이 눈부시다. 창밖에는 수목들이 파릇파릇한 몸으로 서로 비비고, 가지마다 새순을 틔우기 위해 분주하다. 새싹들은 무거운 흙덩이를 밀어 올리며 움트는 소리로 소란하다. 봄이 오는 길목엔 생명의 경이로움이 차오르는 소리뿐이다. 하지만 난 작년 겨울 에스컬레이터에서 미끄러지면서 접질린 왼쪽 다리 골절의 상처는 아직도 회복 중이다.
병원 입원 초기에는 대부분 사고 소식에 놀라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많았지만, 지금은 친한 친구의 전화뿐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회복 중이야. 아직도 재활 치료와 물리치료도 병행하고 있거든.”
“그래 잘될 거야… 더 별일은 없을 거야…”
“사실 그거 별거 아니라니까 십 년 전에 나도 다친 적 있어. 곧 걸어 다닐 테니까 걱정 말어. 그거 별거 아니야.”
친구의 전화는 내가 빨리 회복되어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인식으로 놀랍고도 긍정적인 말이었다. 친구는 냉정하며, 친절하지도 않고 무뚝뚝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속에는 잔잔한 친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난 아프고 절망적인데 친구는 그 근본을 피해 멀리 있는 건너편 희망을 덥석 가져와 말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십 년 전에 다친 이야기는 현실에선 어울리지 않는 희망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지인들이 찾아왔었다. 그들은 나를 위로해 준답시고 하는 말이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좀 쉬라는 신호야. 액땜했다 생각하고 한가하게 며칠 쉬어! 쉬라고 그랬나 봐, 맘 편히 가져.”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니까. 곧 나을 거야. 다행이네. 수술 잘 끝나서 다행이네. 이 정도면 금방 나을 거야.”
지인들은 하나같이 다행(多幸)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그 말뜻을 깊이 이해하고 보니, 다행이란 말은 행복이 많은 것이 아니라, 더 다칠 수 있는 것을 막아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서 머리 다친 사람도 있다면서 미끄러져서 다리는 다쳤지만, 뇌를 안 다쳤으니 다행이고 이렇게 심하게 다리를 다쳤는데, 살아났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것이다. 이런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나 자신도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묵상에 잠겨 다친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정도로 다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지인들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지금은 괜찮아 거의 다 회복되어 가고 있거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좀스러워지는 걸까, 사소한 것들에서 기쁨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염려해 주는 말 한마디에 눈시울이 젖고 따뜻한 눈빛에서 시린 마음이 녹는다.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오늘도 나에게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지인과 친구와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 의미(意味)를 곱씹어 본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만나도 타인이고, 어떤 사람은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도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 나의 지인과 친구와 가족들은 나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는 그런 분들이다.”
겹겹이 늘어서 있는 크고 작은 산맥과 같이 연이은 세월 한편에 자리 잡은 삶의 일면들이 선명하다. 만났다가는 언젠가 헤어져야만 하는 세상의 모든 인연이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요즘,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끝인 것처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남은 시간은 길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행복할 때보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하다고 할 때, 행복의 질량이 훨씬 크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2025. 03. 26
김 종 걸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2019)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